『도구적 평등』을 위한 이력
■ 저자에게 듣는다_ 『도구적 평등: 헌법상 평등의 의미·역할·활용』 (김해원 지음,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581쪽, 2024.02)
헌법 제11조 제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헌법이 명시한 “평등”이 권리로 원용되는 것에 대해 20여 년 전부터 의문을 품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헌법상 평등을 ‘평등권’으로 당연시하고 이를 주관적 권리로 활용하는 것은 헌법에 부합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정리해야겠다고 처음부터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연구의 관심이 다른 데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등을 권리로 활용하려는 자가 논증의 부담을 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권리는 타자에게 일정한 의무를 부과하는 지위라는 점에서 당연한 것이 아닌 특별한 무엇이며, 무엇보다도 헌법은 “평등”이라고 했을 뿐 ‘평등권’이라고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평등권’이라고 칭하지 않고 조심성을 담아 ‘평등원칙’ 혹은 ‘헌법상 평등’이라고 명시한 문헌들이 학계에 등장하는 빈도도 높아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평등권’이 아니라 ‘평등’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 본격적 연구들이 곧 등장하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평등권’을 당연시해 온 학계의 오랜 시간과 이에 기초한 실무의 관행이 축적한 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기대와 달리 평등의 권리성을 정초하려는 시도는 물론이고 평등의 권리성을 의심하는 시도 또한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러한 시도가 차츰 숙제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2013년 “‘평등권’인가 ‘평등원칙’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2013.3.). 해당 논문에서 자신의 고유한 보호영역 및 보호이익이 없어서 항상 다른 특정 권리 및 권리주체와 결부되어 비교적·상대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평등의 특수성에 주목한 후, ‘권리 개념상의 이유’와 ‘헌법 문언상의 이유’로 인해서 헌법상 평등을 권리(평등권)로 구성하는 것의 부적절함을 논증하고, 헌법상 평등을 권리로 원용할 현실적 이유와 실익이 크지 않다는 점과 헌법상 평등이 권리로 원용될 경우 해결할 수 없는 곤란한 문제들(즉 ‘평등을 매개로 한 모든 권리의 기본권화 문제’와 ‘모든 기본권의 평등권화 문제’, 그리고 ‘기본권의 본질내용침해금지를 규정한 헌법 제37조 제2항과의 부조화 문제’ 등)이 발생한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동등대우의 근거이자 차등대우의 근거인 평등에 내재한 모순에 주목해서 헌법상 평등은 한편으로는 대상들 상호 간 동등대우를 통해서 정치공동체의 공통성과 통일성을 나르는 수레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상들 상호 간 차등대우를 통해서 정치공동체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나르는 수레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물론 헌법상 평등을 주관적 권리(평등권)가 아닌 객관적 원칙(평등원칙)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객관적 원칙으로서의 헌법상 평등은 도대체 어떻게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인가?’라는 물음과 마주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응답의 책임으로부터 문제 제기자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달 후 “일반적 평등원칙의 심사구조와 심사강도”라는 글을 발표했다(2013.5.). 해당 글에서 헌법상 평등은 독자적인 고유한 권리가 아니라 헌법적 차원의 권리인 기본권의 침해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객관적 헌법원칙 내지는 기준(기본권 심사기준)으로 원용되어야 함을 명확히 하면서, 기본권 심사기준으로서 평등이 고유성을 갖고 활용될 수 있는 구조와 단계(방법) 및 강도를 이론적으로 상세하게 제시 및 정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립한 ‘일반적 평등활용방법’을 구체적 사례와 결부해서 실증한 연구인 “일반적 평등원칙의 구체적 적용 ― 제대군인지원에 관한 법률 제8조 제1항 등 위헌확인 사건(헌재 1999.12.23. 98헌마363 전원재판부)을 중심으로”를 이듬해 발표하면서(2014.2.), 헌법상 평등에 관한 나름의 연구는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20년 5월 제21대 국회의 출발과 더불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위한 지속적 활동의 성과로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들이 잇달아 발의되면서, 헌법학자로서 특히 평등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자로서 마음의 불편함이 커졌다. 왜냐면 한편으로는 2000년대부터 우리 사회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한 차별금지 운동의 성과이자 그 결집체로 등장한 법률안들(특히 장혜영 안, 이상민 안, 박주민 안, 권인숙 안)에 묵인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점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당 법률안들에 대한 본격적 비판이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담긴 선의를 폄훼하고 진보와 인권을 향한 긍정적 성과에 의도치 않은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불편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관망했다. 그러다가 발의된 법률안들에 대한 현실 정치적 외면과 그로 인한 입법기 만료에 따른 폐기가 거의 확실해졌다는 다행스러움이 들 즈음, 해당 법률안들과 결부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열망도 상당히 식어서 이제는 해당 법률안들은 물론이고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그 자체도 냉철하게 성찰할 수 있는 여건이 커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난해 “차별금지법안과 차별금지운동”이란 논문을 발표했다(2023.05). 해당 논문에서는 국회에 계류 중인 차별금지법안들은 차등대우의 근거로서 헌법상 평등이 갖는 의미를 간과하고 동등대우의 근거로서의 평등에 과잉 경도됨으로써 본의 아니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무엇보다도 평등과 차별에 관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는 신념의 과잉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영역들을 정교하게 살피는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서 헌법상 평등 이념을 구현하려는 해당 법률안들이 오히려 헌법상 평등을 위반한 차별법률안으로 전락했음을 치밀하게 논증했다. 이러한 논증은 다수에 의한 지배가 관철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다수의 열망과 폭력성을 끌어내기 위한 민주주의적 도구로 평등을 활용하기보다는 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도구적·수단적 가치로서 평등을 활용해야 할 필요성(즉 ‘동등대우의 근거로서의 평등’에 비해서 ‘차등대우의 근거로서의 평등’에 대한 잠정적·상대적 비교우위를 인정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현실 인식에서 추동된 것이기도 하다.
2013년의 “‘평등권’인가 ‘평등원칙’인가?”로부터 2023년의 “차별금지법안과 차별금지운동”에 이르는 지난 10여 년의 시간은, 평등에 관한 나름의 연구 성과를 한 권의 책으로 묶고 싶다는 욕망을 키웠다. 하지만 욕망만으로 단정한 책을 쓸 수는 없었다. 특히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쟁점이 있었다. 평등에 내포된 또 다른 모순, 즉 헌법상 평등은 ‘형식적·기회적 평등’을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실질적·결과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이념이라는 점은 크게 주목하여 연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러한 불균형에 대한 마음의 부담 또한 덜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겨울,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 전반에 깊이 침윤되어 다양한 영역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규명해 온 해석적 틀이자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해 온 능력주의를 살폈다.
그 결과 오늘날 능력주의는 헌법상 평등의 한 측면인 ‘기회의 평등(형식적 평등)’에 과몰입하면서도 헌법상 평등의 또 다른 측면인 ‘결과의 평등(실질적 평등)’을 애써 외면·은폐·간과한 왜곡된 평등 이해 및 이에 기초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봉건적·세습 구체제의 타파를 위하여 ‘능력에 따른 배분’을 지향한 혁명적 이념으로서의 가치를 상당 부분 훼손당하고 ‘배분을 위한 능력’ 그 자체를 옹호 및 정당화하기 위한 반동적 이념으로 조롱 및 전락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폐기해야 할 것은 ‘능력’ 그 자체가 아니라 ‘능력주의의 폐해’이며, 헌법 전문이 명시하고 있는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하는 이념으로서의 능력주의는 헌법상 “평등”의 이념과 더불어 조화롭게 보장 및 계승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결과의 평등(특히 능력 발휘를 위한 실질적 여건 마련을 위한 계기로서의 평등)’에 주목한 적극적 평등실현조치(Affirmative Action)나 재분배·사회보장 정책 등을 통한 현실 능력주의의 폐해 교정과 더불어 ‘기회의 평등’에 주목한 사유 실험인 ‘준거지향평가와 추첨제의 결합’을 제도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헌법학 연구자로서 평등에 관한 나름의 오랜 고민을 ‘규범과 현실의 상호 참조’라는 일관된 문제의식에 따라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헌법상 평등의 의미와 역할을 성찰하고, 헌법현실의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난 평등 주장과 그 활용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시도’한 후, 이를 현행 헌법 및 법률 체제 내에 명시적으로 존재하는 “평등” 및 “차별”에 대한 전수조사와 더불어 결집한 결과물이 『도구적 평등』이다.
이 책은 우리의 존엄과 인권을 위한 객관적 도구이어야 할 평등이 주관적 권리(평등권)로 소모되는 가운데, 평등의 내적 모순이 불균형적으로 조정됨으로써 평등의 상실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을 겨냥하고 있다. 특히 ‘동등대우 근거로서의 평등’이 과잉됨으로써 공동체의 다양성·다원화 및 이질성 보존과 소수자의 정체성 인정을 위한 기반인 ‘차등대우 근거로서의 평등’은 과소해지고, ‘형식적·기회적 평등’에 경도되어 ‘실질적·결과적 평등’이 외면받음으로써 근대를 열어젖힌 혁명적 도구였던 평등이 이제는 현대를 재봉건화하는 반동적 도구로 변모할 수 있다는 우려는 담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평등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해·활용될 수 있는지를 밝히고 평등에 내재한 이중의 모순(동둥대우의 근거이자 차등대우의 근거인 평등, 형식적·기회 보장의 근거이자 실질적·결과 보장의 근거인 평등)을 현실 적합하게 조정·조화하기 위한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
김해원 부산대·헌법학
*출처: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05